['산티아고 가는 길' 중의 어느 길]

체증이 있던 저는 전날 Terradillos(마을 이름)의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가 하지 않아 Moratinos 알베르게까지 총 29km를 걸어가 쉬고 Burgo Ranero 라는 좀 큰 마을로 이동했습니다. 카미노 표시(스페인 산티아고 길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대로 쫓아 갔다고 생각했는데 Alternative route(몇몇 구간은 main route 외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로 이동하여 Hermanillos로 도착했습니다. 그렇더라도 목표했던 다음 마을까지 나름대로 6km만 걸으면 되니 약 1시간3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오후 4시쯤 그 마을을 나왔습니다.

마을을 나와 아스팔트 길에 들어선지도 한참, 메세타 평원(부르고스에서 레온이라는 대도시까지 약180Km의 고()원이 이어지는 약 일주일 이상의 길)으로 들어선 것이 약 4 40분 정도니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왠걸 오후 6시가 다 되도 마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는 어느덧 거의 넘어가고 황량한 평원에는 오직 저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슬슬 일몰이 시작되니 겁나더군요. 무섭기도 하구요. 이러다 바람 하나 막아줄 곳 없는 평원에서 노숙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불안했습니다. 긴장돼서인지 무릎과 발목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걸음이 점점 빨라졌지만 간간이 나오는 카미노 표시를 아무리 따라 걸어도 벌써 나와야 할 마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카미노 표시는 보이니 길이 아닌 목적지를 잃어버린 듯 하더군요. 불안해도 표시를 따라 그대로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니 카미노 표시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카미노 길(산티아고 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했는지 얼굴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저 앞에 불빛이 보이기는 하지만 마을이 아닌 거 같습니다. 결국 불빛 있는 곳에 도착하니 고속도로더군요.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시간은 밤 8 30. 서울이면 초저녁 같았을 시간이 이곳에서는 어느 곳 보다 적막했습니다. 배낭에서 파카를 꺼내 입었습니다. 본 것은 많아 겨울일수록 체온조절이 중요하다는 점이 떠오르더군요. 남은 물이 얼마 없어 걱정이었지만 목마름이 오기 전 마시는 것이 좋을 듯 해서 그마저 마셔버렸습니다.

카미노 표시는 다시 메세타 평원으로 갈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불빛을 떠나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원으로 다시 들어서야 하는 것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더군요. 그 때 상황 그대로 깜깜하더군요. 내 자신을 믿어야 된다고 끊임없이 되새기지만, 얼마나 더 걸어야 될지 그 믿음을 불안감이 압도합니다. 그 두려운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했습니다.

어두운 평원을 조그만 등산용 렌턴으로 비추며 카미노 표시를 잃어버릴까 절실하게 찾았습니다. 잊을만하면 나오기는 하나 절박한 심정의 순례자에게 만족함을 주기에는 턱없습니다. 아주 작은 갈림길이 나오더라도 멈춰서 이 길이 맞는지 찾기 일쑤였습니다. 다리를 하나 건너니 저 앞에 건물의 불빛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호텔입니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모두 풀려버립니다. 다리가 풀리네요. 그런데 문이 닫혔습니다. 분명 윗 층에 사람이 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신나는 음악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성탄전야 파티라도 하는 모양입니다. 맥이 풀리더군요. 시간은 9 30분 정도입니다. 힘도 없고 맥도 풀리고 근처에 노숙할 만한 곳 없을지 심각히 고민하다가 조금 더 가보자는 심정으로 걸어가 보기로 합니다.

그렇게 밤 10가 넘도록 걸어 도착한 도시는 황당하게도 Mulas였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원래 가기로 한 목적지보다 무려 약25km를 더 걸어 온 것 입니다. 더 황당한 것은 알베르게가 닫혀 있고 크리스마스 이브라 아까 그 호텔과 같이 호스텔(모텔)도 하지 않더군요. 완전히 노숙자가 될 일보직전 어느 호스텔에서 문은 닫혔지만 청소하는 아줌마가 계셔 창문을 두들기며 사정사정 싹싹 비니 너무나 불쌍해 보이던지 주인을 불러주어 냉방도 되지 않는 호스텔에서 40유로에 잤습니다. 정말 어찌나 빌었던지... 아마 순례자가 아니었다면 에누리없이 거절당할 뻔 했습니다. 그 아줌마에게는 고마워서 5유로를 팁으로 주었지요. 대충 계산해봤지만 그날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대략 50km 정도 걸은 듯 싶습니다.

아무도 없는 평원에서 혼자 길을 걷다가 밤을 맞이하며 길을 찾아야 한다는 심정...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정말 혼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아름다워 보였던 일몰은 그저 일몰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뚝뚝 떨어질 거 같던 별은 그냥 별 그 이상의 운치를 주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숙소에서 나오는 TV속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전야제 축제가 참 거리감 있게 느껴지더군요. 정말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그 날 찍은 마지막 사진! 이후 사진 찍을 엄두도 못냈다(이런 새가슴 같으니~^^)]


                                         [어느 Bar에 있던 방명록. 딱 그 날의 내 마음!]


by 왕마담 2012.01.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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