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우려와 다르게 매우 맑았다.
황사나 한파에 대비한 나의 복장이 어이없어 지지만, 참으로 다행스럽다.
이.순.신. 그가 활짝 대문을 열어두고 맞이하는 듯 한다.
자신에게 가져갈 것이 있으면 모두 가져가라는 듯 하다.
가자... 그에게....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그의 칼을 보았다.
그의 일기를 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보았다. 별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칼은 너무도 커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좀 떨어져서 보았다.
그의 의기가 서려있는 칼, 칼등 위에 새기어진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 산하)”
에서는 그의 처절한 의지가 새기어져 있는 듯하여 그에 대한 애절한 흠모의 마음과 함께
또한 인간이 위대해짐이 언제 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칼은 무엇을 베었을까? 그의 마음을 베었을 것이다.
순간순간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 안락함을 위하려는 마음, 정도가 아닌 길을 걸으려는 마음,
오직 나라를 짓밟은 원수에 대한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그의 모든 마음을 베었을 것이다.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물들을 보고 그 유물관 뒤 편안해 보이는 벤치에서
미리 싸온 보온물통의 따뜻한 물과 함께 한 잔의 인스턴트 커피를 먹었다.
그의 뒤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이 시대 가장 보편화된 차 한잔을 먹는 것에
일순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으나, 그 역시 자신의 지인들에게 보여주었을 법한
소박한 웃음과 함께 자신에게도 차 한잔을 청하지 않았을까?
혼자 엉터리 상상에 슬쩍 웃었다.

충무공의 셋재 아들 이면. 그는 어린 나이로 꽃 다운 꽃 한 번 피우지 못한 채 아산 고향 땅에
쳐들어온 왜적과 싸우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이 유독 아꼈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아들의 죽음을 알았던 이순신은 자신이 대신 죽지 못한 것에 통곡하고
또 통곡하기를 밤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상처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해야만 할 일을 다한다. 이면 역시 자신의 할일을 하다
죽었다고 여길 것이다. 두려웠으리라. 죽을지도 모를 싸움에 두렵지 않을 인간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침략당한 분통과 억울함, 그리고 자신의 가족 나아가 백성과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그 두려움을 이겨냈으리라.



두렵다. 새로운 길이 두렵고, 그 길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는 것에 두렵다.
마음을 열어 사람을 대하는 것이 두렵다. 상처를 줄까 두렵고 또한 받을까 두렵다.
그 상처에 묻혀버릴까 두렵다.
무엇보다 한 번 나온 세상에서 눈을 감을 때 나의 할 일을 다하지 못하였을까 두렵다.
하지만, 이 두려움들을 극복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남을지 두렵지만,
나 역시 그처럼 나의 할 일을 한 점 남김없이 모두 다 이루고 싶다.
단 한 번뿐인 '나'의 삶을 모두 다 쓰고 싶다.
두려움보다 앞서는 나의 삶에 대해 충실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것이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연못이 나온다. 멋들어진 소나무 몇 그루가 작은 섬을 이루고 있는 연못이 나온다.
그 밑을 쳐다보니 많은 잉어들을 풀어놓았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잉어들이 모여들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주는 먹이와 같은 무분별한 간식에 길들여졌을 것이다.
나 역시 사회가 주는 많은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 안락함을 탈피하려는 생각 조차 이리도 힘든 것을 보면 잔뜩 길들여졌음에 틀림없다.
연못의 잉어들처럼...
새로움을 위해서는 그 안락함을 탈피해야만 한다.
나를 둘러싼 보호막이라 생각하는 껍질들과 함께.



잠시나마 그의 칼과 일기에서 그를 느꼈다.
그가 정신을 가다듬을 때마다 바라보았을 큰 칼,
거기에는 그에게 닥친 한 사람이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겨웠을 크나큰 아픔을 지녔지만,
오직 그의 가슴 속에만 묻혀있고
오로지 그의 의지만이 새기어져 있는 큰 칼이었다.
 
한참을 그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담담한 눈빛에서 역할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을 법한 평온함과
알 수 없는 위엄에 공손하며 겸손한 마음을 아니 가질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의 큰 칼을 나의 가슴에 받아들이고 나 역시 나의 마음을 베어가고 싶다.
오로지 나의 정도에 따른 의지만이 남을 수 있도록.
사소한 은원과 주고 받음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리하면 나 역시 그의 의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를 만나고 느끼는 여행.
또한 '나'를 만나는 여행.
이제 시작이다.


by 왕마담 2009.03.1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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