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내한 공연 소식을 접했을 때 쾌재를 부르며 인터파크 티켓 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렸지만 쉽사리 오픈되지 않았다. 차츰 지쳐 가던 중 소리소문 없이 오픈 일자가 떴다. 드디어 볼쇼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단 공연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설렜지만 역시나 비싸다. 무리를 해서 좌석 앞줄 한 가운데를 잡았다. 내심 러시아에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 싸지 않은가 자신을 합리화했다.

 

기왕 합리화한 김에 2층에서 군무까지 넓게 볼 수 있는 조금 싼 자리에서 또 보고 싶었다. 그때 포스터 상단에 자랑하듯 써진 'MARINSKY' 밑에 수줍게 써있는 'Promosky' 라는 단어가 보였다. 검색했더니 여기는 극동지역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 마린스키 분점 발레단이 아닌가. 주역 무용수를 찾았더니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발레단에서는 김기민씨와 테레쉬키나 외 다른 분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린스키 발레단 공연'이 아닌 '마린스키 프리모스키 발레단 공연'이었다. 이런 사정인데도 왜 티켓값이 그리도 비쌀까?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사기 당한 느낌이다. 각종 매체에서는 '전통의 마린스키' 내한 공연으로 마케팅하더니 은근슬쩍 다른 분점 공연이라니.... 국내 발레단이 ABT의 주역 무용수를 초빙하여 공연한다고 ABT가 되는 건 아니잖은가.

 

 

 

 

[인사마저 춤스러운 '빅토리아 테레쉬키나'와 '김기민씨']

 

 

 

마음이 상했지만, 드디어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은 발레리노 김기민씨를 기다리는 건 즐거웠다. 파트너 빅토리아 테레쉬키나(Viktoria Tereshkina)가 출연하는 <돈키호테>를 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데 시원시원한 춤이 인상 깊었다. 다른 영상을 찾아보며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의 레벨을 느꼈다. 그녀의 흑조는 누구보다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기민씨보다 테레쉬키나의 오딜이 더욱 기다려졌다.

 

막이 오르자 그 동안 기대했던 거 모두 그 이상이었다. 마음을 비운다고 비운 군무는 또한 그 이하였다. 경탄과 하품이 오갔던 색다른 무대가 펼쳐졌다. 1막의 군무는 생각보다 '괜찮네' 싶었지만, 파드트루와(3인무)를 지그프리드 왕자(김기민씨)가 아닌 친구가 출 때부터 실망했다. 분명 전날 유튜브로 접했던 볼쇼이와 키로프('마린스키' 예전 이름) 발레단 영상에는 왕자가 추었기에 1막에서 제일 기대했던 장면이었는데, 변죽만 울렸다.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셜발레단 실력에 못 미치는 듯한 군무진들이 더욱 마음에 안들었다. 그렇지만, 김기민씨는 왕자에 어울리는 폴드브라와 우아한 걸음, 맛보기 춤들로 이후에 마음잡고 추면 어떨지 기대케 했다. 순수한 장난꾸러기 캐릭터를 연기하는 듯 보였다. 생일 선물로 받은 석궁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은 보는 이 또한 흐뭇하게 만들었다.

 

 

 

 

 

 

 

<백조의 호수>는 내게 특별한 작품이다. 전막공연을 본 첫 작품이자 실제 발레를 하도록 이끌었다. 2015년, 지금은 워싱턴 발레단으로 간 이은원씨가 오데트와 오딜을 맡아 감명을 불어 넣었다. 2막 시작할 때 '정경' 음악에 맞추어 로트바르트(악마)가 왕자를 뒤에서 조정하듯 합을 맞춘 안무는 아직도 기억날 만큼 임팩트가 강했다. 이번에는 이마저 밋밋했다. 안무의 구성도 로트바르트 바리에이션에 가까워 기민씨 춤을 마음껏 볼 수 없었다.

 

이 지난함을 한 번에 날리는 '신'이 나오는데, 바로 백조 '테레쉬키나'의 출연이다. 우선 군무진과 확연히 차이 나는 우월한 신체 그리고 깊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당한 자신감이 표출되는 듯한 카리스마는 단연코 군계일학이었다. 곧 이어지는 선으로 만들어지는 춤은 보는 이로 몽롱한 현실감을 주는 백조의 세계로 이끌었다. 왕자와의 만남부터 사랑을 맹세하는 파드되까지 경탄의 연속, 가련 청순한 백조를 탈피해 당당한 사랑을 나누는 듯한 모습까지. Swan Queen의 등장이었다.

 

더한 감탄은 역시 3막, 테레쉬키나를 찾으면 유독 흑조 오딜의 영상이 많았던 이유가 드러났다. 많은 기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캐릭터 소화와 카리스마, 그리고 춤이었다. 직접 보니 입이 자연스레 벌어져 감탄과 함성을 자아냈다. 흑조로 분해 무대로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자 관객석 여기 저기서 짧은 함성이 나왔다. 춤 추기 전부터 그녀는 완벽한 흑조의 사악한 미소를 내뿜었다.

 

 

 

 

[완벽한 흑조, 그리고 저 사악한 미소란.... 사진 출처: 구글 검색]

 

 

 

파드되 중 아다지오가 마무리될 때 흑조는 에튀튜드 포즈를 취하는데 영원히 간직하고픈 자세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왕자는 이미 넘어갔다. 밀당하듯 왕자를 잠시 밀치는 단호한 표정과 연이어 어르는 모습까지, 자신감 넘쳐 도도함이 가득한 테레쉬키나의 오딜을 보며 영화 <블랙스완>의 모델이지 않을까 싶기도. 그녀의 에튀튜드는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다. 비현실적인 팔다리로 정확한 각을 잡은 모습은 완벽한 '미'를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얘들아 이게 에튀튜드야~' 라는 듯. 사실 그녀의 모든 춤이 그렇다. 날갯짓마저 철저한 연습 속에서 나왔을 자연스런 완벽함을 본다. 힘과 유연함 그리고 탄력까지 그녀만 보였다. 기민씨의 본격적인 춤을 추기 전까지.

 

아다지오가 끝나자 관객의 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도 기민씨는 여유로웠다. 아니 곧 자신의 춤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는 흥분이 살짝 보이기도. 김기민씨의 지그프리드 바리에이션이 이어졌다. 눈 앞에서 내려오지 않을 거 같은 '그랑제떼'가 직접 보이자 함성과 감탄 그리고 박수가 터졌다. 영상으로 볼 때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그저 높이 뛰어 오르는 게 아니고 공중에 잠시 멈춰 있는 거 같다. 연속된 점프턴은 얼마나 유려하고, 피루엣은 어찌나 빠른지.

 

 

 

 

 

 

 

오딜의 바리에이션은 역시 '치명적'이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 카리스마 넘치고 뇌쇄적인 춤이 이어지는데 음악이 받쳐 주지 못했다. 아다지오부터 불안했다. 바이올린 솔로가 나올 때 음정이 맞지 않는 건지는 몰라도 뜨악한 느낌을 받으며 몰입을 깼다. 프로 무용수라 흔들림 없어 보였지만 집중력이 얼마나 흩트려졌을까. 그것만 아니라면 오딜에 더욱 가까운 테레쉬키나를 만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오로지 주역 2명이 이끌어나간 공연이었다. 흑조 파드되 전에 나오는 디베르티스망은 군무진이 아예 혹평을 받으려고 작정한 듯 싶었다. 조금 보태어 말하면 학예회 수준처럼 느껴져 한숨이 나왔다. 합이 도저히 맞지 않는다. 군무를 보기 위해 2층에서 한 번 관람하려한 마음을 접은 건 탁월했다. 차이콥스키 음악에게도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오케스트라마저 불안함을 야기했으니. 음은 개별적 화성이 한 번에 들린다기 보다 좋지 않은 이어폰을 사용한 것처럼 뭉뜽그린 듯 느껴졌다. <백조의 호수> 음악들이 익숙하기 때문에 덜했지만, 모르는 음악이라면 빠져 들기에 어려웠을 듯 했다.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역 2명이 혼신을 다했던 '흑조 파드되'만이 평생 기억될 공연이었다.

 

 

 

[Swan Lake Suite by 코리안심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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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2017.11.23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