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독주 연주회는 처음이었습니다. 잘 알고 있는 곡이 많지 않았지요. 자주 듣는 곡이 많지 않지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은 유독 좋아합니다. 또한, 14번 '월광' 피아노 소나타의 1악장 역시 어디선가 자주 들어 익숙했던지 금방 이끌렸어요. 두 곡 모두 '아다지오' 템포가 공통점인걸 보면 좀 느린 곡을 좋아하는 듯 싶습니다.

 

KBS교향악단의 연주회를 예매하러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갔어요. '비창'과 '월광' 피아노 소나타 연주를 피아니스트 김선욱씨가 연주한다는 소식에 자세히 봤더니 더하여 베토벤의 '열정'까지 유명하고 익숙한 곡들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더군요. 마치 저를 위한 것처럼. 망설임없이 바로 예매부터 했습니다. 그나마 알고 있는 피아노 연주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시간을 어찌 놓치겠습니까.

 

바로 세 곡의 음원을 구입해 시간나는 틈틈이 들었습니다. 악장 하나를 들어도 좋지만 역시 전 악장을 모두 들으면 왠지 더 잘 이해하는 기분이 들어 친숙해졌어요. 지난 1월말 말러 교향곡 3번의 감명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듯한 롯데 콘서트홀에 들어서자 그랜드 피아노 한대가 고독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곧 그 악기가 내 가슴에 어떻게 파고들지 자리에 앉으며 기대감으로 들떴어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침착해보이는 김선욱씨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일말의 망설임없이 건반을 정복해갔습니다. 그 모습은 좀 의외였어요. 보통 연주자들은 잠깐이라도 집중하기 위해 틈을 갖고 연주하던데, 그의 모습에서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바흐의 <토키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 BWV564>는 예습을 못한 탓인지 앞으로 나올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의 intro 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습의 중요성이여.

 

베토벤 초기 걸작으로 손꼽히는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은 '비창'으로 많이 알려진 곡입니다. 김선욱씨가 특유의 화음으로 시작하여 Grave(엄숙하고 무겁게 혹은 장중하고 느리게) 서주를 손으로 짚어내는 데 벌써 심장이 두근 거리며 집중되네요.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베토벤이 그려놓은 음표를 자신이 해석한대로 타건해나갔습니다.

 

'비창' 1악장 주요 주제가 시작되자 불안하게 깔려있던 긴장이 증폭되어 다가오네요. '그의 악보까지 미리 공부해 놓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벌써 연주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서주의 멜로디가 혹은 그 분위기로 돌아갔다가 트레몰로의 긴장으로 끝났습니다. 그 긴장감을 단번에 녹여버리는 2악장의 시작.

 

 

 

 

 

 

 

더 이상 '어디가 주제이지?', '조성이 바꼈나?', '어디가 멜로디?' 머리로 생각하려는 음악이 가슴으로 진하게 밀려 옵니다. 그 따위 생각 걷어치워버리라는 듯. 진한 여운이 감도는 여음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3악장의 론도 알레그로의 익숙하고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에 어깨에 갖고 있던 시린 감정을 날려버렸어요.

 

베토벤 뿐만 아니라 다른 자곡가들의 음악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시작하자마자 듣는 이를 음악 속으로 훔쳐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14번 C# 단조 Op.27/2 '월광'으로 친숙한 곡 역시 1악장부터 처연한 달빛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연주 후 어느 사이트에 올린 김선욱씨의 해설은 일품이었죠. 아마 평론가 최은규씨가 연합뉴스에 올린 비평을 읽고 썼던 거 같습니다. '월광'이라는 부제가 붙은 건 베토벤이 1801년 곡을 작곡한 이후 31년이나 지난 후 붙여진 부제인데, 달빛에 비유되는 곡의 해석대로 연주하고 싶은 마음은 0.1%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3악장, 피아니스트 김선욱씨]

 

 

 

그의 말을 읽으며 소신에 감탄했습니다. 그렇다고 평론가를 뭐라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건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문화는 더욱 좋은 연주와 관람문화를 성숙시켜줄테니까. 베토벤은 이 곡에 '환상곡풍 소나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의해 '호수에 비친 달빛'으로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듯 해요. 이런 음악이 어느 하나의 느낌으로만 이해되는 건 아깝지 않을까요?

 

이번 연주회 가장 기대했던 건 '열정'으로 불리는 '23번' 소나타의 3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주회 관람 후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건 '14번' 월광의 3악장이었지요. 23번 열정 소나타는 이 곡의 연장선에 있는 거 같기도 했습니다. 마치 베토벤의 열정이 용솟는 느낌이랄까요? 피아노가 으르렁 거릴 정도로 느껴졌던 속주는 감탄을 계속 자아냈습니다.

 

그 열정은 베토벤이 낭만주의 시대를 열어가는 에너지가 되었을 겁니다. 이 곡은 고전적 소나타와 거리를 두고 낭만적 표현이 실험되는 작품이 되었어요. 제목부터 그 느낌이 강하지요? 23번 F단조 Op.57 '열정'이 틈새를 아예 찢어버리듯 연주회 피날레를 열어젖혔습니다. 앞에 들었던 '비창'과 '월광'과는 확연히 구변되는 연주였어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김선욱씨]

 

 

 

느낌 상 앞의 두 곡에서 보여지던 규칙이 없어진 듯 종잡을 수 없는 진행이었습니다. 아다지오의 서정과 알레그로의 격분을 왔다갔다 하는 느낌의 1악장에서는 중반부에 나오는 지속음의 변화가 주는 긴장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란한 연주는 말할 것도 없었죠. 가장 기대한 3악장은 2악장의 안단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제가.

 

아침부터 여러 일정을 소화했던 내 몸, 그 한계가 다가왔어요. 김선욱씨가 멈추지 않고 3악장으로 넘어가는 걸 느끼지도 못했어요. 어느덧 연주가 몽롱하게 들렸습니다. 체력이 아쉬웠어요. 중요한 순간에 밀려든 졸음이 한껏 원망스러웠어요. 이 긴장 넘치는 음악을 현란하게 연주하는 데도 졸음이 그리 쏟아지다니. 눈은 억지로 떴지만 정신은 베토벤의 음악과 긴선욱씨의 연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역시 기대하는 공연 전날에는 푹 쉬는 게 좋네요.

베토벤이 그의 음악에 숨겨놓았다는 유머는 이런 순간의 다크한 웃음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연주정보>

 

1. 관람일 : 2017년 3월 18일

2. 공연명 : 김선욱 피아노 리사이틀 베토벤

3. 프로그램

 1) 바흐-부조니(편곡)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C장조, BWV564

 2)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3)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4)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by 왕마담 2017.04.0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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