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은 몽테뉴가 47살 때 출판되었습니다. 그가 흥미를 두었던 자기 자신의 탐구에 대한 결과물이었지요. 2년 후에는 첨삭을 가해 2판을 내었습니다. 58살 눈을 감기까지 총 5판까지 썼고, 수양딸로 삼은 드 구르네 양을 통해 6판까지 간행되었어요.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결정적 이유는 역사적으로 사상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말한 칭송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을 읽은 것 같다고 하는 내용이지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며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끄집어 냈어요. 또한 삶 그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오는 사유들이 그를 실천적 철학자로서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이 'xx주의' 하나로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과 삶의 불완전함 그 자체를 껴안은 사유가로 봐야 할 듯 해요.

 

무척 솔직하게 쓰여진 이 책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쇼킹했을 듯 합니다. 프랑스의 혹독한 혼란기인 16세기는 온갖 인간군상의 모습이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역병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한 도시를 무너뜨리기도 했죠. 종교적 대립이 가져온 내란은 인간의 잔인함과 맹목적인 광기가 어디까지 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기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je?)'라는 질문을 핵심으로 불확실한 인생을 관찰하고 타협하며 현재를 마음껏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몽테뉴. 그렇다고 술과 여자에 빠져 흥청망청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내면의 절도를 지켜 삶을 구속하려는 세계에서 빠져 나와 있는 그대로를 누리는 삶을 말하지요.

 

인생은 살아 있는 동안이 전부라고 생각한 그가 편하게 살 길을 찾은 건 당연한 듯 싶습니다. 그 속에서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그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많이 준 듯 해요. 회의주의는 인간과 삶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다만, 책 읽기가 어렵습니다. 사라 베이크웰이 몽테뉴의 에세를 다룬 <어떻게 살 것인가>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허우적대기 일쑤였죠. 지금 시대에 쓰이는 표현이 아닌 16세기의 글로 쓰여진 책이니 당연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몇몇 구절에서 실제적 도움을 얻었습니다.

 

P20. 나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남의 것을 빌려서 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서 부유해지려 한다.

 

여전히 다른 사람이 ''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고 거기에 속박되는 내 모습, 16세기의 사람들 역시 그러했구나 라는 위안을 느꼈습니다. 또한, 진짜 자신으로 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태도와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시 다시 생각하게끔 되었지요.

 

P145. 그는 쾌락과 놀기와 소일하는 일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자칫하면 다른 모든 목표들은 꼴사나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고 있다.

 

요즘 놀기에 푹 빠진 내 모습을 가끔 불안하게 여기는데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빠진 놀이는 취미지요. 이걸 통해 존재적 즐거움이 주는 안락함이 일상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놀기 위해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더 나아가 놀이의 규정을 일상의 온갖 것들로 확장하고 싶네요.

 

P149. 싸울 때는 싸워야지. 서로 예의를 찾고 기교를 피우며 상대방의 감정을 상할까 두려워서 태도에 제약을 받는다면, 그것은 힘차게 호방한 우정이 못 된다.

 

친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누군가와 부딪히는 경우는 무척 불편해 합니다. 나의 감정이 울그락 불그락 타인에게 발견되는 모습은 싫거니와 타인의 그런 모습이 나 때문에 나온다는 것도 싫은 거죠. 그러나 그 모습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오해 받는 경우도 많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불편해도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 때문에 나를 억압하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그럴 즈음에 만난 소중한 구절입니다.

 

P183. 성을 공격하여 돌파한다. 사절로서 외국에 나가서 담판한다, 한 국민을 통치한다 하는 것은 찬란한 행동이다. 자기 식구들과 자기 자신을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이런 일은 그리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렵다.

 

독특해 보이는 그리고 자신의 비전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 비해 매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나는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요. 근래는 일상 이 자체를 잘 꾸려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이 요소 속에서 핵심과 본질을 꿰뚫어 성장을 도모하고 즐기는 행위는 새로운 패러다임처럼 느껴졌어요. 16세기 몽테뉴 역시 왕이나 장군 등보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눈이 달라 보였습니다.

 

P194. 내 태도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집착하고 대개 내가 원하는 것도 순하게 원하며 그다지 바라지도 않는다. 일을 맡아보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일도 드물게 하지만 침착하게 한다. 사람들은 원하여 행하는 것은 온 의지로써 맹렬하게 해나간다. 세상에는 실수가 너무 많으므로, 가장 확실한 길은 세상을 좀 가볍게 피상적으로 흘려 보내는 일이다. 미끄러져 가야지 그 속에 처박혀서는 안 된다. 쾌락에 대한 욕망도 너무 깊이 들어가면 고통이 된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삶에 대한 태도가 이 구절에서 명확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꿈과 비전 찾기에 골몰해있던 시기 반대로 일상은 그지 같았어요. 오로지 내 인생은 비전 찾기와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만 여겨졌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는 다른 구성 요소도 많았어요. 내가 일할 수 있는 직장,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 좋아하고 즐기는 취미들, 춤추듯 다가가고 싶은 비전과 꿈, 삶이 주는 축제같은 숙제들 ...... '현재에 만족한다'는 개념은 아니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지금의 온갖 것들을 즐기고 싶은 겁니다. 이게 삶을 대하는 지금의 제 태도지요. 얼마 안 있어 또 바뀔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몽테뉴'를 검색했더니 뜬금없이 루이뷔통의 몽테뉴 가방이 나온다^^]

 

 

'그는 이 책을 왜 썼을까?' 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피니 '인간의 조건, 영광과 명성, 자만심, 욕망, 잔인함 등'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에 더해 '독서, 대화, 질병, 여행, 취미 등' 일상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두 망라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까지.

 

결국 몽테뉴는 기왕에 사는 삶, 좀 더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쓴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을 실현하고 주도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뿐이었으니 본인에 대한 관찰에 대한 책이 바로 이것이겠지요. 탁월한 그리고 진솔하며 사람에 대한 애정이 더해진 그의 생각은 철학이 되고 사상이 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by 왕마담 2014.06.0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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