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여행중 만난 긴급재난문자, 바람에 날라가는 줄 알았다]

 

 

휴가를 냈지만 전날 밤 늦게 들어갔더니 짐 챙기는 게 귀찮아졌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올레길 트레킹을 떠나려 했어요. 멍하게 걷고 싶은 마음이 벌써 몇 개월째 이어졌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아직 늦겨울 추위를 이겨낼 정도로 마음이 여물지 않았나 봅니다.

 

일찍 일어나 챙기자는 마음에 그냥 잤어요. 한 번 귀찮아지면 어떤 자극이 와도 움직이기 어려운 요즘입니다. 눈 떠보고 날씨를 살피니 예보대로 비가 왔습니다. 이럴 때는 예보가 틀리지 않더라고요. 하필 떠나는 날 궂은 날씨가 찾아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작년에도 여행가는 날에 맞춰 태풍이 와서 비행기표를 취소했거든요.

 

그때처럼 취소하고 늦잠 좀 자다가 운동하고 카페가서 책이나 읽고 싶었습니다. 비구경하면서. 바람도 세찬게 제주도는 이미 강풍에 바짝 움츠려 들었다는 소식입니다. 온갖 변명이 생겼어요. '떠나는 날 이렇게 비바람이 세찬건 떠나지 말라는 의미아니냐?'',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제주공항에 무사히 도착해도 서귀포까지 1시간 넘게 버스타고 가야 되는데 잘 갈 수 있을까?', '목도 칼칼한거 같고, 피로하고 피곤한데 무리해서 여행가봤자 감기만 걸리는 거 아닐까?'

 

여행가지 않아도 될 변명거리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갔다 왔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 순례길 도보 여행을 떠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였어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이러다 또 못가겠다고 여겨지더군요. 일단, 손에 잡히는 데로 짐을 집어 넣고 등산용 가방을 짊어매고 집을 나섰습니다.

 

수서에서 김포공항까지 지도상으로 멀었지만, 9호선 급행 지하철을 갈아타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셀프 체크인을 하고 잠깐 기다리니 금방 탑승하더군요. 앞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탑승권 없이 모바일 QR코드로 타는 걸 보고 다음에는 저렇게 타야지 싶었습니다.

 

비바람이 꽤 세찼지만 비행기는 거침없이 이륙했어요. 제주 근방에 다가갈수록 기체의 흔들림도 그만큼 커졌습니다. 착륙 전 롤로코스터를 탄 것처럼 급강하하는 바람에 몇 번을 머리가 주뼛 서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경험을 했어요. 난생 처음 비행기에서 손잡이를 꽉 움켜 잡게 되더군요. 구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얼른 봉투도 찾아놨습니다.

 

'이러다가 사고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불안감이 엄습했어요. 악천후를 알리며, 안전벨트를 꼭 매어주시고 아기는 안전하게 품에 꼭 안고 있어달라는 승무원의 안내방송 다급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비행기 내부는 고요해졌어요. 모두 긴장하는 듯한 침묵이 흐르며 급강하할 때는 여기저기에서 약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이후 몇 번의 롤러코스터 경험을 하고 이윽고 활주로에 거칠었지만 바퀴가 닿자 안도됐어요. 비행기 내부 공기도 가벼워졌습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나 봐요. 공항 밖으로 나오니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와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마음까지 움츠러 들었습니다.

 

여행 안내소에서 '올레길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고 가야 되요?' 물었더니 정색을 하며 말리더군요. 그냥 성산에 먼저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번호를 알려줍니다. 예전에는 터미널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직행 버스가 생겼어요.

 

버스를 타자 긴장이 좀 풀렸어요. 좀 졸다가 눈 떠 보았더니 어느덧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통 나뭇잎과 가지들이 뒹굴어 다니는 걸 보고 비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짐작케했어요. '걸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성산에 도착해서 버스를 내리자 바람이 싸다귀 갈기듯 몸 속으로 파고 드네요.

 

이 바람에 올레길을 걷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잠시 몸을 녹였어요. 마음이 그제서야 말랑해지는지 여행온 게 실감났습니다. 별안간 실소가 났어요. 여행, 그것도 국내여행 오면서 이리도 긴장하며 온게 웃겼나봐요. '어쨌든 왔잖아~'.

 

우비를 구해 카페를 나서 숙소를 잡았습니다. 바람이 여전히 세차니 짐을 가벼이 하고 오름은 위험할테니 1번길을 뒤에서 걷자 싶었죠. 해변의 뻥 뚫린 길을 걸을 테니 바람에 날라가지 않으면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번 길 중간에 해물 파스타가 기가 막힌 곳이 있거든요. 거기까지만 걸으려고 했어요.

 

성산일출봉 입구에서 1번 길을 거꾸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긴급재난문자'가 뜨네요. '제주지역 풍랑경보'였습니다. 웃음이 또 터졌습니다. 대차게 걸렸구나 싶었어요. 해안가를 나가니 그 세찬 바람이 시원하게 여겨졌습니다. 주변에 사람도 없어 미친 놈처럼 냅다 소리를 마구마구 질렀어요.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아침부터 갈팡질팡스러운 마음이 한 순간에 날라갔습니다. 우렁찬 파도소리, 미끄러지는 구름, 머리가 멍할 정도로 와서 부딪히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자 뭐랄까 억눌린 그 무엇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걷다가 사람이 없을 때는 노래같은 소리를 지르고 혼자 신났습니다.

 

파스타(아~ 그사이 주인이 바뀌어 옛날 맛이 나지 않더군요)까지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어요. 지랄(?)하며 걸었더니 힘없어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돌풍은 몸마저 날라갈 듯 여겨지더군요. 호텔로 들어왔더니 아늑했습니다. 뜨끈하게 샤워하고 캔맥주 한 잔하며 TV를 좀 보고 있는데, 별안간 전기가 나갔어요.

 

'아이쿠~ 뭐야 이건 또?' 하며 커튼을 열어 보니 성산 부근 모든 전기가 꺼진 듯 했습니다. 오늘 바람이 태풍에 맞먹다는 말이 맞나봐요. 바람때문에 동네 전체가 정전이라니. '하아~' 한숨이 먼저 나왔지만 곧 너무나 고요했습니다. 달빛이 비추이는 창가에 세찬 바람과 파도 소리 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적막' 그 자체였어요.

 

제 마음마저 이상하게 평온해졌습니다. '오늘 귀찮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을 또 할 수 있었을까? 여행오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머뭄이 너무나 익숙해진 요즘이었어요. 떠남은 동경했지만, 먼 곳의 그 무엇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세찬 비바람이 겁났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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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실제 여행은 2월말 ~ 3월초에 다녀왔습니다.

 

P.S2 : 안녕하세요오래간만이지요? 편지가 뜸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보낸다는 약속은 못할 거 같지만, 끌리는 흥미를 쫓아 열심히 놀고 있겠습니다. 가끔씩 그 소식 나눌게요. 그러나 저러나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1번길 거꾸로 걸으니 뒤로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날씨 참...]

 

 

 

[2번길에서 만난 오름, 대수산봉 정상에서]

 

 

 

[2번길 끝, 3번길 시작점에서 만난 카페에서, 신나게 걷고 마시는 맥주 한잔~ 캬아~]

 

 

 

[바람이 거칠었던 날의 밤에 만난 휘황찬란한 보름달, 지금까지 봤던 가장 큰 보름달]

 

 

 

 

[성산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난 마리아칼라스, 손님없는 틈을 타 좋은 스피커로 들은 'Sempre libera' 감동감명울컥!]

 

 

 

 

[여행 마지막 날에서야 화창해졌다, 헐~ 제주야 다음에 또 보자^^]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의 'sempre libera' in <La traviata>]

by 왕마담 2018.04.0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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