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대

 

예매할 때부터 기다려온 서울시향의 말러 교향곡 1번을 관람했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보다 직설적으로 힘차고 희망적이어서인지 인기가 많죠. 신비로운 도입부, 흥겨운 무곡, 평온한 자연을 떠올리게 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팡파레와 때로는 긴장하게 만드는 밤 기운까지 느낄 수 있어 풍성했습니다.

 

관람 전 예술의 전당 주변을 산책 겸 어슬렁거리는데, 서울시향 제2바이올린 파트 수석 임가진씨를 만났습니다. 그 분만이 주는 깊은 감정 표현을 처음 접했던 건 작년 이 무렵 베토벤 6번과 7번 교향곡 연주였어요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연주 모습에 반했습니다.

 

'와~ 그분과 마주치다니......' 사인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곧 있을 연주를 위해 이어폰을 꽂고 조금 긴장한 듯 대기실로 가는 분을 멈춰 세우기에는 미안했습니다. 대신 '오늘도 좋은 연주를 부탁합니다' 라는 의미에서 인사를 건넸더니 모르는 사람이라 좀 의아해하셨지만 곧 웃으며 답례를 해주시네요.

 

 

 

 

 

 

2. 송곳

 

여유로운 산책은 물론 좋아하는 연주자까지 만나 인사를 나누다니 기대가 커집니다. '타이탄(거인)' 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말러 교향곡 1번은 초연에서 참담한 비판을 받습니다. 평론가는 물론 음악애호가들도 엄숙한 교향곡에 장난이 심했다는 평을 남기죠.

 

낭만주의 끝물이었던 당시 브람스와 바그너로 양분되어 있던 세계에 말러라는 송곳이 튀어나온 형국이었어요. 특히, 교향곡은 브람스의 엄격한 형식과 구성을 따르는 고전주의적 전통에 익숙해있던 청중들이었습니다. 바그너의 혁신은 주로 오페라/음악극에 치우쳐있었죠.

 

전통 따위 집어던진 듯 요즘 가요와 같은 민속음악을 덧입히고, 팡파레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불협화음을 특징으로 내세운 말러의 첫 번째 교향곡이 좋은 평가를 받기에는 시대적으로 일렀어요. 참고로 말러는 당시 '작곡도 하는 지휘자'로서 작곡가보다는 실력 있는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말러 교향곡 1번의 4악장]

 

 

 

3. 느낌

 

근래에는 베토벤의 5번 교향곡처럼 음악사적으로 흐름을 바꾸어 중요하면서도 인기 많은 작품 중 하나가 되었죠. 이 작품은 앞으로 말러가 쭉 싸우게 될 비난의 끝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나의 시대는 올 것이다'라며 온갖 혹평을 극복한 투쟁, 그 끝머리를 담은 음악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거야 제 생각이고 당시 말러가 보았던 거인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만년에 만난 북유럽의 대표 작곡가 시벨리우스와의 대화 중 '교향곡은 세계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 세계란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얘기하는 듯 합니다특히 불완전한 인간이 그 제약을 극복한 모습을 바라봤을 듯 해요.

 

그의 취향과 유년 시절 기억도 담고 있습니다. 별장을 알프스에 짓고 작곡에 몰두할 정도로 자연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고 해요현악기의 미세한 떨림으로 만들어낸 신비로운 기운이 현악파트 전체로 퍼지며 연주되는 1악장은 그가 느꼈을 자연의 모습을 담은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근처 병영에서 들려오던 팡파레 또한 깊고 뚜렷한 인상을 주었다고 해요먼 곳에서 들리는 팡파르 효과는 그 기억의 단편을 불러오는 듯 했습니다. 1악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 곡이 가고자하는 바를 미리 보여주는 듯 하이라이트 팡파르가 울리는 데 평온한 자연 속에서 깨어나는 '거인'이 연상되더군요.

 

흥겨운 2악장은 친숙했습니다. '렌틀러'라는 민속무곡이 울리죠. <말러, 그 삶과 음악>이라는 책에서는 왈츠의 시골판같다더군요말러가 남긴 설명에는 어느 한 청년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발견했을 때의 순수한 행복을 그리고 있다고 하지만 제게는 거인의 깨어남을 축하하는 파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냥 신나지 만은 않았어요. 어느 순간에는 음울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1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죠. 그 암울한 기운이 가장 많이 묘사된  3악장입니다. 마치 밤길, 그것도 숲 속의 밤길을 묘사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길 잃은 거인의 한숨이 들리는 듯 해요.

 

이 악장에서는 팀파니 연타와 함께 연주되는 부분에서 눈길이 많이 가더군요. 저만의 느낌이지만 왠지 뽕짝기운도 살짝 느꼈습니다. 유명하다는 동요 '마르틴 형제'를 패러디한 멜로디 부분이죠. 본인이 작곡한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일부분도 인용했습니다.

 

 

 

 

 

4. 거인

 

마지막 악장에는 찬란한 하이라이트가 두 번 있어요첫 번째 팡파르는 거인이 극복하거나 이겼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몰락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죠. 진정한 승리로 단번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비웃는 듯합니다. 말러는 교향곡 1번에 설명을 달아놓았습니다만 후회했다고 해요. 그 이유는 직접 들어볼까요?

 

"동기가 된 연애 사건보다 교향곡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네. 현실의 사건이 창작의 이유가 되긴 했지만 그게 창작물의 진짜 의미인 건 결코 아니지. 내가 교향곡을 통해 내 안의 감정들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오로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불가사의한 감정들이 북받칠 때 뿐이네. '다른 세계'란 사건들을 시간과 공간 개념에 따라 구분하지 않는 세계이지." (말러, 그 삶과 음악 중)

 

, 연애 사건으로만 보려는 대중을 보며 답답해 했다고 합니다. 그가 쓴 설명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될 뿐입니다말러 교향곡 1번을 듣는 내내 한 인간의 깨어남과 일어남, 그리고 쓰러짐을 느껴요. 평온한 자연 속에서 노래하는 종달새의 희망찬 소리와 길 잃은 밤 하늘에서도 별을 보고,  가시덤불을 만납니다.

 

혹독한 세계를 헤치고 나온 인간이 다시 일어설 때의 모습을 보아서일까요? 풀 오케스트라 광채 속에서 빛나는 환희가 펼쳐지는 두 번째 하이라이트는 감동스럽습니다. 진정한 거인이 따로 있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말러의 음악뿐 아니라 삶에서도 그 흔적을 봅니다.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혹은 공포)'를 앨범배경으로 만든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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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는 말러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으로 시작했어요. 중세 독일 민담에 나오는 틸 오일렌슈피겔의 행각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의 천방지축 사고처럼 음악도 장난기가 다분한 듯 들렸지만, 오케스트라 구성은 교향곡 빰칠 정도로 대편성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중후반부에서 소리가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나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는 부분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마치 장난치다가 멈춘 듯 하지만 다시 장난치는 꾸러기 같았죠.

 

협연자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토퍼 박과 함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Op.54>는 차분하게 들렸습니다. 지난 5월 교향악 축제 중 원주시립교향악단에서 들어봤던 적이 있는 곡이었죠. 당시 박력적이었던 피아니스트의 해석과는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 현란한 초절정기교를 좋아했는데, 2악장처럼 매우 느린 곡이 마음에 울림을 많이 남기네요. 마치 있어야 할 음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아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참고

1. 스티브 존슨의 <말러, 그 삶과 음악>

2. 황진규씨가 쓴 네이버캐스트의 말러 교향곡 1

3. 프로그램 노트

 

 

[말러교향곡 1번 Full Version]

 

 

by 왕마담 2016.08.08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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