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다수의 스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저도 감상 전 스포를 증오하는 바, 아직 보지 못하신 분 중

스포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않는 게 마음 건강에 좋을 것입니다.

 

 

 

 

1. 프롤로그

 

뉴욕 메트로 폴리탄 공연 실황 오페라 <카르멘>을 메가박스에서 관람했습니다. 4월 초 장일범씨의 <카르멘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먼저 들었어요. 1막부터 4막까지 주요 아리아들을 들으며 주인공들의 심정과 이야기의 흐름 그리고 배경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꼭 보기로 마음 먹었으나 상영기간 끝물에서야 접했네요.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집시 카르멘(아니타 라흐벨리쉬, 메조 소프라노)과 연인 돈 호세(알렉산드로 안토넨코, 테너)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었어요. 삼각관계를 더하는 투우사 에스카이요(일다르 압드라자코브, 베이스)와 호세와 이미 약혼한 미카엘라(아니타 하르티그, 소프라노)가 나옵니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는 이탈리아와 독일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어요. 조르주 비제로 인해 이 두 국가와 어깨를 견주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 오페라는 두 갈래로 나뉘어요. 궁정 오페라인 그랑도페라와 서민들에게도 개방된 오페라 코미크입니다. <카르멘> 이름에 자주 붙는 '코미크'의 유래되며, 연극적인 대사를 허용하죠.

 

 

[Carmen, Overture]

 

 

2.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조르주 비제

 

비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유망한 작곡가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수이자 성악 교수였고 어머니 역시 피아노 연주 실력이 뛰어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에 친근해졌지요. 9살의 나이로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당시도 이례적으로 손꼽히는 사례입니다.

 

18 <기적 박사>라는 희가극을 자곡하여 그 해에 유망한 신진 작곡가에게 주는 로마 대상을 받으며 이탈리아 유학을 떠나지요. 기악곡을 주로 작곡하다가 약 3년 후 귀국하여 작곡에 전념합니다. <진주잡이(1863)>, <페르트의 아름다운 처녀(1967)>, <자밀레(1872)> 등의 오페라를 만들어 인정은 받으나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해요.

 

비제는 어렸을 때의 화려한 등장과 다른 초라한 성과에 초조해했을 듯 합니다. <카르멘>의 완성에 집착했을 것일테죠. 1875 3월 초연 당시 지금의 인기를 누리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겁니다. 1막부터 빠져나간 관객들이 4막이 끝난 후 거의 나갔다고 하네요. 이런 냉담한 반응에 대한 충격이 병이 됐을까요. 3개월 후 세상을 떠납니다.

 

<아이다>, <라보엠>과 함께 오페라 흥행 선두주자인 <카르멘>이 당시 왜 인기가 없던 걸까요? 기존의 '청순가련형' 이탈리아와 다른 남자 같은 여주인공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왕과 귀족이 주인공이었던 작품들만 보던 오페라 애호층은 집시, 병사, 여공 등 하급계층에 포커스를 두고 밀수와 치정살인과 같은 이야기에 불편했을 거라 추정되네요.

 

 

[카르멘과 돈 호세]

 

 

3. 핍박을 정열로, 집시

 

당시 사람들에게 유대인보다 더 많은 천대와 괄시를 받아왔던 집시가 주인공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었을 겁니다. 1막의 배경인 세비야의 담배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사회 최하층민들인 집시로 이루어졌지요. 제게는 이 요소가 다른 오페라와 달리 유난하게 땡기게 만든 작품입니다.

 

스페인 여행 때 마드리드의 어느 따블라오(플라멩코 쇼를 하는 식당)에서 첫 눈에 반해 배우기까지 한 플라멩코라는 스페인 집시들의 전통 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2막 시작 아리아인 <집시들의 노래(Chanson Boheme)>에만 나오는데 단 한 장면임에도 자주 볼 수 없어 느끼던 갈증이 사라지는 듯 오페라 속에 잘 녹아 들었습니다.

 

<집시들의 노래>는 마치 축제 속에 있는 듯 느껴졌어요. 주고 뺏는 혹은 밀고 당기는 느낌의 흥겨움이 있습니다. 이 속에 유럽인들에게 핍박 받던 집시들의 한을 삶에 대한 정열로 담은 춤과 음악 그리고 노래, 플라멩코가 어우러지죠. 심장까지 울리는 특유의 비트는 언제 접해도 환상적입니다.

 

 

[Carmen, 집시들의 노래(Chanson Boheme) by Agnes Baltsa]

 

 

4. 사랑도 자유, 카르멘

 

1막에서 담배공장에서 동료와 싸워 감옥에 갇힌 카르멘, 유혹의 아리아 <세기디야(Seguidilla)>에 심장까지 내줄 기세인 돈 호세는 그녀를 풀어주고 대신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토록 치명적이었던 건 카르멘과 처음 만나던 담배공장에서 끼부린 <하바네라(Habanera)>에서 깔린 떡밥 효과가 큰 듯 했어요.

 

<하바네라>는 쿠바의 아바나 음악과 닮았습니다. 담배가 수입되어 들어오며 그곳의 음악 역시 함께 스며들었겠죠. '당신이 싫다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라는 가사를 들으면서 작품이 관통하는 '사랑'에 대한 주제를 보는 듯 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자유로운 카르멘의 단면 또한 볼 수 있지요. 음정이 하강구조를 이루는 특징을 보입니다.

 

다시 2막의 파스티아 술집으로 가볼까요? <집시들의 노래>이후 투우사 에스카밀로의 <투우사의 노래(Toreador song)>가 이어지며 카르멘과 스타 투우사 간의 미묘한 감정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1막에서 돈 호세와의 첫 만남과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장면이죠.

 

곁가지 이야기지만,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카르멘은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카르멘 맡기를 꺼려했다고 하네요. 콘서트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건 상관하지 않았지만 성향과 다른 역이라 부드럽고 밝은 역할을 맡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카르멘의 유명 음반 중 하나는 마리아 칼라스가 출연한 1964년 녹음판이죠.

 

 

[Habanera by Maria Callas]

 

 

 

5. 우리, 돈 호세와 에스카밀로 그리고 미카엘라

 

감옥에서 나온 돈 호세는 카르멘의 격정적인 사랑 고백에 황홀에 빠지지만 의무를 잊지는 않습니다. <꽃노래(Air de fleur)>를 부르며 자신의 사랑을 비추며 귀영 나팔 소리에 돌아가려는 찰나, 상사와의 싸움과 카르멘의 부추김에 탈영하며 밀수 집단에 속하게 되지요.

 

3막은 명예를 중시하지만 사랑때문에 집시 집단이 된 돈 호세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카르멘의 갈등으로 시작하죠. 또한, 산 속까지 찾아온 에스카밀로와 대결까지 하게 합니다. 그를 찾아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약혼녀 미카엘라의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말하지(Je dis que rien ne m'epouvante)>의 높고 맑은 아리아에 호세뿐만 아니라 청중의 마음까지 울리죠.

 

돈 호세는 카르멘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비장한 다짐을 남기고 어머니 곁으로 떠나며 3막이 끝납니다. 4막은 투우장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시작하죠. 한 쌍의 연인이 된 카르멘과 에스카밀로의 심정같습니다. 곧 폐인이 되어 나타나는 돈 호세의 심정과 극명하게 엇갈리는 장치 같아요.

 

 

[Carmen, 투우사의 노래(Toreador Song)]

 

 

6. 사랑, 피와 죽음

 

이번 Met 공연에서 막을 가리는 커튼은 인상적입니다. 검은 색 배경의 천과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는 칼날에 그어진 듯한 빨간색은 선흔을 의미하는 듯 했어요. 마치 카르멘의 허벅지에 난 상처 혹은 그녀의 의상과 비슷합니다. 빨간색과 검은색, 피와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4막의 하이라이트이자 <카르멘>의 핵심은 자신의 변심에 실망하고 위협하는 돈 호세에게 대응하는 카르멘의 반응입니다. 호세는 그녀를 어르고 달래고 호소하며 위협해보지만 차가운 거절만 당할 뿐이죠. 이성을 잃어 결국 카르멘을 죽여 영원한 사랑을 꿈꿉니다.

 

이 장면을 통해 비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는 또 하나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자유'입니다. 카르멘이 호세를 거절한 이유는 결코 에스카밀로의 열렬한 사랑이기 보다는 집시로서의 자유였을테죠. 그리고 그를 카르멘 나름의 방법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의 온갖 시련을 대하는 모습과 닮은 듯 합니다.

 

 

[막과 막 사이에는 공연하는 발레]

 

 

7. 에필로그

 

익숙한 <투우사의 노래> 이외에 잘 모르는 아리아가 많아도 이토록 재미있게 봤던 오페라는 <라보엠>이후 처음이네요. 플라멩코를 포함한 스페인 문화의 익숙함이 도와준 듯 합니다. 또한, 사랑에 대해 오글거리지 않도록 그린 이야기 역시 한 몫 톡톡히 했어요.

 

'카르멘'이라는 여인의 죽음과 사랑마저 묶어 놓지 못하는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은 제 욕망과 비슷해 보여 동경스런 마음으로 본 듯 합니다. 일상의 온갖 도덕적 관념은 그녀의 발 아래에 놓인 듯 보여 무척 시원한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카르멘 역의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가 외모적으로 좀 더 많은 매력을 담았다면 더할나위 없었을 듯 해요.

 

쿠바의 아바네를 비롯 파소도블레 등의 다양한 음악으로 흥겹고도 서글프며 비장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다양한 아리아를 감상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일상 속에 ''를 관념적으로 다양하게 묶어 놓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 감동은 물론 여운까지 남으니 저와 같이 오페라 많이 접하지 않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상영정보 : 메가박스 The Metropolitan Opera HD Live

관람일시: 2015년 6월 3일

 


by 왕마담 2015.06.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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