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재계약을 했습니다. 어머님 혼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건 무리기에 하루 휴가를 냈어요. 전날 필요한 걸 준비해놓아 집 재계약은 30분도 안되어 끝났어요. 동사무소에서 필요한 서류 두 가지를 받는 게 제일 오래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이 집에 이사온 게 고등학생 때이니 벌써 20년 가까이 살았네요. 우리 집은 SH공사에서 관리하는 영구 임대 아파트입니다. 이사올 당시 한부모 가정으로 돈 버는 가장이 없어 당첨됐어요. 전에는 송월동이라는 동네에서 월세를 내며 살았습니다.

 

작은 마당이 있어 요즘 같은 겨울에는 수도관이 꽁꽁 얼어 따뜻한 물로 데워 줘야 했습니다. 눈이 쌓이면 움푹 들어간 마당이 하얗게 없어졌어요. 거기에 발자국을 내면 신났습니다. 화장실은 마당 한 구석 음침한 곳에 있어 무서웠어요엄마 몰래 수돗가에서 볼 일 보다 걸려 혼나기도 했습니다.

 

연탄을 떼는 집이었어요. 윗풍이 세서 자리에 누우면 등짝은 따뜻한데 얼굴은 쌀쌀했어요. 기억나지 않는데 죽다 살았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연탄 가스가 안방으로 샜다고 하네요. 마당에 기어 나와 '' 지리고 김칫국 마시고 정신차렸다고 합니다. 병원 갔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네요.

 

집에는 방이 3개 있었어요. 안방과 부엌은 우리 집이, 옆방에는 점치는 역술풀이 아줌마가 살았습니다. 인사하면 싹싹하다고 용돈을 쥐어 주고는 했어요. 가끔씩 엄마와 무당 아줌마가 고스톱 치는 밤에는 잔심부름 하며 오락실에서 탕진할 코풀이 돈을 받곤 했습니다.

 

다른 옆 방에는 젊은 언니가 살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옷가게같은 곳에서 일했던 듯 합니다. 어느 날에는 방 열쇠를 잃어버렸는지 잠시 우리 방에서 누굴 기다렸어요. 과자를 사줬는 데 어린 나이에도 쑥스러웠는지 말 한마디 없이 과자 먹으며 TV만 봤습니다.

 

집에 고양이를 키웠던 적이 있었어요. 겨울 바람 막으려고 방문에 걸어 놓은 담요를 발톱으로 뛰어 오르는 고양이와 노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항상 손등이 할큄으로 긁힘 투성이였습니다. 새들을 쳐다 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려는 자세, 쥐를 죽이던 그 카리스마는 어린 심장까지 두근거렸어요.

 

잘 알지 못하지만 등장 자체로 움츠려 드는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바로 집주인이죠. 다른 곳에 살면서 돈 받을 날에만 왔어요. 나타나기만 하면 버선발로 달려 나가 맞이 하는 엄마였습니다. 어느 날 당장 돈을 낼 수 없어 조아리던 모습을 봤어요. 그때부터 우리 집은 우리 집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올 때 기쁜 마음은 이것이었죠. '우리 집이다'. 그리고 '내 방이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너 결혼해서 애들 키워 학교 보내면 영구 임대 아파트비교 당할 거야’라는 말을 들었어요. 웃어 넘겼지만 집에 들어갈 때 '우리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주소 쓸 때 멈칫하게 되는 '도시개발'이 주는 뉘앙스가 싫었어요. 왠지 부끄러웠습니다. 동네 이름만 들어도 부러워할 집에 이사가고 싶었어요.

 

몇 일 전 제 방 형광등이 나갔습니다. 스위치까지 이상한 걸 보고 맛이 갔구나 싶었어요. 관리 사무소에 연락하고 회사 다녀오니 싹 교체됐습니다. 방안이 전보다 더 환해졌어요. 마음도 바꾸고 싶습니다. 어디서 살든 형편에 맞춰 살면 될 뿐인데. 새로 받은 계약서를 보며 '사는 집이 우리 집입니다'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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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한 마음으로, 지상 Dream

http://wangmad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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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안녕하세요. 왕지상입니다. 이 편지는 한 주 한 주를 보내면서 겪은 일들과 그 느낌을 매우 개인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니 이런 소식이라도 나누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수 많은 스팸 메일 중 하나를 더 추가할지 모를 우려를 뒤로 하고 보냅니다. 이런저런 회신을 주신다면 더욱 좋을 일이지요. 그러나 저러나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by 이선희 in 30주년 세종콘서트]

by 왕마담 2014.12.22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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