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다수의 스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저도 감상 전 스포를 증오하는 바, 아직 보지 못하신 분 중

스포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읽지 않는 게 마음 건강에 좋을 것입니다.

 

 

 

1. 루돌프 누레예프

오랜 기간 남자 무용수는 발레리나를 거들어 주는 역할일 뿐이었죠. 천재라 불린 바슬라프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 1890~1950)에 이어 발레 역사를 바꾼 루돌프 누레예프(Rudolph Nureyev, 1938~1993)로 인해 발레리노 역시 주목 받습니다.

 

1938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출생한 누레예프는 외모뿐 아니라 실력까지 갖췄습니다. 1961 5 19일 키로프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로서 파리에서 '라 바야데르'를 공연하죠. 약 한 달 후 6 16일 파리 근교 부르제 공항에서 망명을 선언합니다. 이때부터 러시아에게는 유명한 배신자가 생기게 된거죠.

 

이후 로열 발레단에서 슬럼프를 겪고 있던 마고 폰테인과 커플을 이루며 전성기를 보냅니다. 1964 10월 빈에서 89회 커튼콜을 기록한 <백조의 호수>는 기네스북에 올랐지요. 1983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 예술 감독이 되며 지금까지 오페라단을 먹여 살릴 프로그램을 만들며 안무가의 능력도 발휘합니다. 현재도 많은 무용수들에게 최고 롤모델로 꼽히지요.

 

 

[루돌프 누레예프와 마고트 폰테인이 함께 출연한 <지젤> 중]

 

 

2. 발레

플라멩코의 기본 스트레칭으로 배운 몇몇 발레 동작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스트릿 댄스를 좋아하는 성향이었던 지라 발레나 (현대, 한국)무용과 같은 춤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얼마 전 시즌3까지 마무리된 <댄싱9> 프로그램을 통해서 발레와 무용에 많이 익숙해진 듯 합니다.

 

이탈리아어 발라레(Ballare, 춤추다)를 기원으로 하는 '발레' 16세기 이탈리아 메디치가에서 프랑스로 전해지며 궁정 왕족들에 의해 추어지죠. 루이 14세 시대에 오면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며 19세기 전반 낭만 발레 시대가 열립니다.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환상, 우울, 괴기, 죽음의 이미지 역시 낭만의 범주에 포함되어요.

 

<지젤>, <라 실피드> 등은 로맨틱(낭만) 발레의 대표 작품입니다. 클래식으로 불리는 고전 발레는 감정 표현보다는 테크닉을 중시하는 러시아에서 꽃 피우죠.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등이 대표 작품들입니다.

 

 

[중력을 무시하는 듯한, 루돌프 누레예프]

 

 

3. about 갈라

누레예프 탄생 75주년을 기념하는 <누레예프 갈라>는 유독 '빠드되(pas de deux, 2인무)'로 이루어진 춤이 많아요. '발레 블랑'이라 표현되는 32명 또는 24명의 발레리나들이 추는 군무는 없습니다. 파리 오페라, .쇼이, 로열, 마린스키, 영국 국립, 독일 국립 발레단의 정상급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출연하죠.

 

프로그램은 누레예프가 안무했던 대표 레퍼토리로 구성됐습니다. 배우 엄태웅씨의 아내로 친숙해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출신의 윤혜진씨의 해설이 처음에 겹들어 있어요.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자막이 나오니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두 번째는 지인 분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서 같이 보게 됐는데, 두 번을 봐도 즐거웠어요. 발레라는 생소할 수 있는 공연예술에 대해 값싸고 질 높은 영상과 음악을 같이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다른 분들께도 추천했으나 선뜻 땡기지 않았는지 관심을 끌지 못해 아쉬웠어요.

 

 

[누레예프 갈라 예고편]

 

 

4. 갈라 작품들과 느낌

이번 갈라는 생전 누레예프에 의해 재탄생한 10개의 안무를 보여 줍니다. 각각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이라이트 부분이 공연되죠. 모두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작품들이라 신기하여 느낌 위주를 기록해봤습니다.

 

 

[라 실피드 중 한 장면]

 

[라 실피드, 2막 파드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레 작품으로 손꼽혀요. 군무를 지칭하는 발레블랑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작품이라는 건 시초인 낭만 발레라는 뜻이 되기도 하죠. 이 작품 역시 요정과 마녀가 나오며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개 안무 중 첫 작품으로 선택될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발레리노는 우아하더군요.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슬플 줄 알았는데, 서로에 대한 사랑 이야기는 감미로웠습니다. 춤은 베를린 국립 발레단에서 맡았어요.

 

[볼쇼이 발레단의 Evgenia Obratztsova]

 

 

[라 바야데르, 3막 망령의 왕국 파드되]

<지젤>을 안무한 마리우스 프티파가 1877년에 만든 작품으로 누레예프가 안무를 개정해서 선보였습니다. '바야데르'란 인도의 신전을 섬기는 무희를 의미하죠. 신에게 바쳐져 결혼할 수 없는 바야데르(무희)인 니키야와 권력과 아름다움에 팔리게 되는 솔로르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감상할 때는 발레리노가 솔로르인 듯 했어요. 무대 배경과 의상만으로 인도적인 색깔이 풍겼고, 장소는 이슬람의 사원 같기도 했습니다. 무희인 니키야 혹은 영주의 딸 감쟈티 역을 맡은 볼쇼이 발레단 발레리노 Evgenia Obratztsova의 우아한 선의 몸짓에서는 애절한 느낌이 짙게 나오더군요.

 

 

[마농의 한 장면]

 

 

 

[마농, 침실 파드되]

마농 역을 맡은 타마라 로호의 춤은 유혹적이었습니다. 카르멘의 자유로운 느낌마저 들었지요. 해당 작품에 대해 알아 보니 <기사 데 그뤼와 마농 레스코의 이야기>라는 프랑스 소설이 원작이었습니다. 아름답고 남자를 유혹하는 데 뛰어난 마농과 순진한 기사 데 그뤼에 대한 파멸적인 사랑을 다루었어요.

 

마농을 맡은 타마라 로호(Tamara Rojo, 1974~ )는 스페인 최고 발레리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런 평가를 모르고 봤을 때도 그녀의 춤은 사람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었어요.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발레리노가 발레리나를 잡고 콤파스를 돌리는 듯한 동작은 뇌리에 많이 남네요.

 

 

[투 피스 포 헷의 한 장면]

 

 

[투피스 포 헷]

플랑멩코 춤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정적이 휘감긴 무대에서 빠르게 두 댄서의 합을 맞춘 동작에 이어 각자의 춤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멋지더군요. 특히 전통스러운 발레라기 보다는 현대무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후반부에서는 다시 발레스럽게 바뀌는 듯 했어요.

 

아쉽게도 이 춤과 누레예프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 안무가 van Manen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설명할 때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앞으로 검색 그물을 뿌려놔야 할 듯 합니다.

 

 

[머펫쇼에 출연했었던 누레예프, 코믹 발레까지 섭렵^^]

 

 

[레이몬다, 3막 파드되]

왕궁에서 시작했다는 발레, 어떻게 탄생했을지 상상케 하더군요. 귀족 아가씨인 레이몬다와 그녀의 약혼자인 기사 쟝 드 브리엔와의 사랑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다른 부분과 달리 사랑의 결실이 죽음이나 영원의 맹세가 아닌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슬리핑 뷰티, 3막 파드되]

데지레 왕자가 너무 늙어 보여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분장빨이었겠지요. 깨운 왕자와 깨어난 공주와의 사랑을 표현하는 춤인 듯 보여 찾아 봤습니다. 3막이 둘의 결혼식을 보여주네요. 화려하지는 않았기에 아마도 신혼 초야나 결혼식 직전을 보여주는 춤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말년의 마리우스 프티파는 작곡 단계에서부터 차이코프스키에게 간섭했다고 해요. 이에 스트레스를 무척 받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한, 대규모로 꾸며진 작품으로 만들었지요. 이 작품은 1막 이전에 프롤로그까지 있습니다. 아마도 안무가 프티파는 이 작품으로 발레의 모든 요소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가장 누레예프같다는 Mathias Heymann]

 

 

[만프레드]

유일한 발레리노 혼자만 나오는 작품이여요. 가장 누레예프 같다는 평을 듣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마티어스 헤이만이 출연합니다. 어두워요. 한 남성의 불안하고 조급하며 두려운 내면 세계를 그려내는 듯 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작품 말미에 발레리노가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죠.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찾아보니 바이런의 시를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발레를 만든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대신 여기서의 만프레드는 모친을 사랑하여 근친상간에 이릅니다. 거기에서 오는 음울한 내면을 보여주는 춤입니다.

 

[팬이 되어 버린 Tamara rojo, 무대 뒷편]

 

[마그리트와 아르망, 중간]

이번 갈라 프로그램 10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누레예프의 대표작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마크 폰테인이 아닌 이는 추지 못했을 정도니 '봉인 당했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듯 해요. 마그리트를 연기할 몇 되지 않는 발레리나 중 하나인 타마라 로호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전반부 사랑하는 사람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곧 저승 사자와 같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놀랍고 슬픈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모습, 후반부 꺼져가는 사랑과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애처로운 연기를 선보이는 타마라 로호의 춤과 연기의 폭은 상당히 깊고 넓어 보였어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원작소설인 <춘희>에 영감을 받아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속에 애쉬튼경이 안무한 작품입니다. 원작에서는 마그리트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달랐어요. 위의 저승사자와 같다는 발레리노는 마그리트의 아버지였고,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 듯 합니다.

 

 

[백조의 호수 중 한 장면]

 

 

[백조의 호수, 2막 파드되]

<마그리트와 아르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 <백조의 호수>는 가장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그 유명한 테마곡이 나올 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아쉬웠어요. 몇 일 후 우리나라의 국립발레단의 작품으로 이 갈증을 해소하기는 했지만, 극장에서는 '~'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오데트(백조)와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에 대한 위기를 그린 2막이기는 해도 긴장감이 넘치는 로트바르트가 나오지 않아요.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주를 이르는 듯 했습니다.

 

[해적, 노예 파드되]

갈라의 마지막 작품은 누레예프가 키로프 발레단 바가노바 아카데미의 졸업 작품이기도 했던 <해적>입니다. 이후 키로프 발레단 무용수가 되지요. 의미는 컸지만 이전의 대형 작품들과 비교해서는 격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이 들었지요.

 

 

[발레리나 윤혜진씨의 누레예프 갈라 해설]

 

 

[작품 프로그램]

1. “La Sylphide”, Act II pas de deux (ch: Bournonville); danced by Iana Salenko and Marian Walter of the Berlin Staatsballett.

2. “La Bayadère”, Kingdom of the Shades pas de deux (ch: Petipa); Evgenia Obratztsova of the Bolshoi Ballet and Evgeni Ivanchenko of the Mariinsky Ballet.

3. “Manon”, Bedroom pas de deux (ch: MacMillan); Tamara Rojo of English National Ballet and Frederic Bonelli of The Royal Ballet.

4. “Two Pieces for Het”, (ch: van Manen), Maia Makhateli and Remi Wörtmeyer of Dutch National Ballet.

5. “Raymonda”, Act III pas de deux (ch: Nureyev after Petipa); Aurélie Dupont and Mathias Heymann of the Paris Opéra Ballet.

6. “The Sleeping Beauty”, Act III pas de deux (ch: Petipa); Evgenia Obratztsova and Dmitry Gudanov of the Bolshoi Ballet.

7. “Manfred” (ch: Nureyev); Mathias Heymann of the Paris Opéra Ballet.

8. “Marguerite & Armand” (ch: Ashton); Tamara Rojo of ENB and Rupert Pennefather of The Royal Ballet, supported by James Streeter, also of The Royal Ballet.

9. “Swan Lake”, Act II pas de deux (ch: Petipa, Ivanov); Daria Vasnetsova and Evgeni Ivanchenko of the Mariinsky Ballet.

10. “Le Corsaire”, pas de deux (ch: Petipa); Aleksandra Timofeeva of the Kremlin Ballet and Vadim Muntagirov of The Royal Ballet (although with ENB at the time of filming).

 

 

[루돌프 누레예프]

 

 

5. 마무리

관람 전 풍월당에서 누레예프 발레 특강을 들었습니다. 누레예프가 나왔던 <백조의 호수 1막 바리아시옹과 3막의 흑조 파드뇌>, 롤랑 프티 안무와 지지 장메르가 함께 출연한 <젊은이와 죽음>이라는 작품을 봤죠. 아주 예전이지만, 리복 CF에서 나왔던 의자를 밟고 넘어가는 춤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강렬한 발레리노 이상 사람을 이끄는 어떤 매력을 지닌 듯 보였어요. 루돌프 누레예프를 통해 발레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영혼의 파트너라는 마고 폰테인이 궁금해졌고, 갈라를 보고 난 후 어느새 타마라 로호라는 발레리노의 팬이 됐습니다. 여전히 남성이 발레를 한다는 건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표현하듯 쉽지 않습니다.

 

발레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게 여기는 듯 해요. 하지만 그건 하나의 관념일 뿐입니다. 예술이란 단단하게 굳어져 상식이라 여기는 비상식을 깨부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공연예술 중 발레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한 듯 합니다. 중력을 거스르고, 자연스런 몸짓에 역행하는 몸짓예술 발레, 땡기시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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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에로스의 예술, 발레 (김도윤 지음, 살림지식총서)

2. 김문경의 발레특강, 누레예프 갈라 (풍월당)

 

by 왕마담 2015.07.0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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